
“누구의 눈치도 볼 것 없이,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고, 어떤 대단한 목적도 없이, 그저 저절로 신명이 나서 공부하는 내 자신의 모습. 어떤 목적도 없이 공부 그 자체에 몰입해 있는 나 자신이야말로 내가 가장 사랑하는 내 모습이었습니다.”
- 정여울, 『공부할 권리』
사실 저는 공부를 굉장히 이상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세상의 문제들을 해결한다는 원대한 사명감이 아닌 신비하고 아름다운 것들을 탐구하며 알아나가는 과정 자체를 답답해하면서도 좋아하는 사람이죠. 그 과정 속에 있을 때면 마치 다른 세계에 있는 마냥 시간이 빨리 갈 때도, 느리게 갈 때도 있으며 내용이 이해가 잘되지 않아 지칠 때도 있지만 그 안에 있을 때면 행복한 제 모습을 볼 수 있죠. 물론 이렇다고 매번 점수가 잘 나오는 모범생이 되지는 못합니다. 꾸준히 높은 점수를 받으며 공부한다는 건 사실 부지런함과 끈기가 필요하죠—싫은 내용도 보고 또 보며 다양한 문제 유형을 익히는 성실함은 부끄럽지만 아직은 제게 부족합니다. 이 때문에 항상 모범생이라는 꼬리표와 함께 공부를 안 하는 학생이라는 두 개의 상반되는 꼬리표를 한 몸에 달고 다니는 학생이었습니다. 각각의 꼬리표가 제 자신에 대해 맞는 설명임에도 불구하고 그 어디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 있을 때면 항상 외롭고 혼란스러웠죠.
그래서 대학교 3학년 때 1년간 휴학도 하게 되었습니다. 한편으로는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내 방식대로 하고 싶어서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모습의 나는 이 세상 어디에서 무엇을 해야 쓸모가 있을까 걱정되는 마음에 도망친것이기도 했습니다. 주변 친구들이 좋은 인턴십과 함께 학회에 등재되는 논문도 내는게 부러웠고, 그들이 향하는 밝은 미래에 나는 가지 못할까봐 두렵기도 했죠.
물론 휴학한다고 이러한 고민들이 바로 사라지진 않았지만, 천천히 그리고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했습니다. 특정 요인이나 계기를 통해 마법같이 나아졌다기보다는 가족들의 응원과 더불어 내가 무엇을 왜 좋아하는지 천천히 생각해보는것이 큰 도움이 되었어요. 그리고 신기하게도 헤밍웨이의 소설들도 큰 위로가 되었죠—주인공들이 하나같이 원대한 이상이나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게 아닌 주변 사람들과 지금 순간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들을 본받고 싶었어요.
중간 과정들을 많이 빼먹었지만, 9개월이라는 휴학 시간의 끝에 배운 것은 내가 걷는 길에 신념을 가지는 것과 맞는 길을 선택할 수 있는 혜안, 그리고 진지하게보다는 즐겁고 긍정적이게 열심히 지금을 살아가는 태도를 가져야한다는 점을 배웠습니다. 다가올 미래를 두려워하는게 아닌, 기대하며 살아가기로 말이죠.
많은 점을 배우며 새로운 마음가짐을 가져도 여전히 변하지 않는것들도 있습니다. 하나는 남들보다 느리게 내용을 습득하더라도 아름다움을 따라 깊고 꾸준히 공부하는 모습으로 남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이 세상에 이로움을 남기는 탐구의 산물이 나오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세상을 바꾸겠다는 당찬 포부는 되지 못하지만, 제 가장 솔직한 마음들을 눌러 담아 더욱 정이 가며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글입니다.